유약한 몸, 나르시즘, 그리고 정체성 정치


영어 원문이든 번역서이든 내용 자체가 쉽지 않아 아주 여러번 읽어야 함을 미리 경고한다. 원문과 대조하며 한 4번 쯤 읽어볼 때 나는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아주 오랫동안 특수교육을 했던 내가 굳이 장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게다고 뛰어들었을까라는 주위의 우려와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매일의 일상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번 학기,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해본다.


제 2장에서 저자는 장애학기 당면한 비판들 중에 주요한 심리적 모델로서 나르시즘을 제기한다. 장애인의 손상과 고통이 어떻게 내면화하여 나르시시즘으로 보여지는지의 과정을 설명한다. 나르시시즘은 단순한 자기애를 넘어선다.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며 주위의 관심을 갈구하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본다. 저자는 장애인이 나르시시트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을 알아보고, 동시에 어떻게 메타심리학이 장애 그 자체의 개념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주려한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나르시시즘은 장애인을 이해하는데 매우 극단적인 모델일 것이다. 그는 <나르시시즘에 관하여:나르시시즘 입문>에서 유약한 몸을 가진 장애인은 사랑을 주거나 받는 것을 멈추버리고 이는 자기중심주의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결국 아주 오랫동안 병리적 정신장애로 분류된 나르시즘은 정체성 정치( Identity Politics)를 비판하는 해석의 틀의 역할을 했다. 나르시즘 개념은 집단 심리학에는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니 만큼 비판의 도구를 잘못 선택한지도 모른다. 장애인들을 무의식적으로 나르시시즘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정치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구성물이라는 그의 선언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앞서 집단의 심리를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은 나르시즘을 뒤로하고 정체성 정치의 시작을 살펴보자. 미국의 권리운동과 맥을 같이 하며 정치적 힘을 주기위해서 ‘특별 권리’라는 수사학적 전략이 사용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의 경우, ‘특별하다’는 낙인이 오히려 시민권과 권리 획득을 가로막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다, 시민이다”라는 관점을 강조해야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거이다. 이 또한 개별성을 강조하며 '특별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장애 당사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장애인들이 정치적으로 연대하려는 과정에서 그 특별함은 그룹을 쪼개서 개별화시키며 그 힘과 중심을 분산시킬 뿐이다.

개인성 그 자체는 정치적 활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그 능력을 상실했다는 저자의 선언을 상기하며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에서 설 자리를 잃은 장애아동을 떠올린다. 물리적, 형식적 통합교육은 장애아동에게 제대로된 교육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개인의 손상과 고통은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문제행동'으로 발현되고 더욱 분리된 교육환경으로 떠밀리고 있다.


특수교육대상자는 개별화교육계획과 개별적 지원이 담보된 법적 권리를 바탕으로 교육현장에 배치된다. 저자는 '개별화'된 교육계획과 지원이 사회가 장애를 “특정 개인만 가진 특수한 문제”로 좁혀서 보게 되어 정체성 정치의 활용성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개별화된 교육계획을 강조하다보면 장애인은 사회적 차별이 아니라 개인적 결함 때문에 고통받는 피해자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특별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장애인의 나르시시즘으로 환원되는데 하지만 저자는 이게 사실 장애인 탓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담론이라는 걸 폭로한다.


처음부터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는 특수학교가 없었다면? 이란 상상을 한다. 만약 우리의 교육체계가 글로벌한 포용적 교육이라는 지향에 가깝고 또는 그런 이상향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굳이 아동의 교육권을 보호하기 위한 '개별화교육계획'을 외치는 특수교육의 목소리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세기를 거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인식과 제도안에 이미 오랜시간을 갇혀 있었다. 누구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지원체계나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채 정상성 범주에 속한 비장애인들만을 위한 사회적 제도적 장치가 공고하다. 그러나 이제와서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개별적인 지원을 고려하여 보도 블록의 일부를 깍아내는(curb cut)을 하는 것으로 접근성을 개선하려는 개별적 시도가 만연할 뿐이다(Dolmage, 2017).


특수교육은 '특별한 교육' 에 대한 요구이며 권리처럼 들린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우리는 '특별한 교육이고 권리' 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실정이다. 교사들이 제대로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 Ignacio Estrada의 말 "만약 그들이 우리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배울 수 없다면, 어쩌면 우리가 그들이 배우는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라는 인용구를 나는 자주 사용한다. 개개인의 학습 능력과 스타일에 맞춰 교육 방식을 조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것은 '특별한 권리'로서의 요구가 아니며 보통의 아이처럼 교육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응원하는 목소리일 뿐이다. 교육이라는 제도가 일반교육과 특수로 분리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타임머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미 이분법적으로 인식되어온 장애아동의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식으로 모두 배울 수 있다는 근거없는 논리는 버려야 한다. universal design 이 고려된 포용적인 교육 현장을 바라볼 때 장애의 정체성 정치는 '특별함을 요구한다'는 오명을 벗겨주어야 할 것이다. 특수학교 설립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부모들은 유약한 몸에 대한 나르시즘인가 아니면 비장애인인 교사와 또래들의 스스로의 불안을 통해 해결받지 못한 무지의 결과인가.

마지막으로, 유약한 기관인 우리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고 외치며 저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돌봄임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 구절에서 넬 나딩스 (Nel Noddings) 의 돌보는 자–돌봄 받는 자의 상호성을 바탕으로 교육 현장에서 케어 윤리가 실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돌봄의 윤리(Ethics of Care)를 떠올려 본다.



출처
Siebers, T. (2008). Disability theor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Dolmage, J. T. (2017). Academic Ableism: Disability and Higher Education.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http://www.jstor.org/stable/j.ctvr33d50

댓글

가장 많이 본 글